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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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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믈랭을 위한 변명 === 1940년 3월, 30개에 달하는 연합군 사단들을 벨기에 영내로 진격시킨다는 딜-브레다 계획을 채택한 가믈랭의 결정은 적의 기습에 대응할 예비대 전력을 크게 감소시켜 독일군의 작전 수행에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가믈랭의 딜 - 브레다 계획 확장이 프랑스의 패배를 불러왔다는 것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이 또한 그때 확보할 수 있었던 최상의 정보를 기반으로 한 최선의 결정이었다. 게다가 가믈랭은 전선 중앙에 지나치게 부주의했고, 아르덴 숲을 통과하는 독일군의 기동은 프랑스군이 제때 대응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느릴거라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다. 하지만, 가믈랭의 이런 실수들조차 1934년 국방 장관으로써 유사시에 벨기에로 진격해야 한다 주장하며 아르덴 지역의 위험성을 일축한 필리프 페탱의 오판에 근거한 것이었다. 애초에 반대편에 있던 독일군 또한 아르덴 숲을 통과하는 기동이 성공할 거라 여기지 않았다. 독일군의 황색 계획은 슐리펜 계획의 재탕이나 마찬가지였고 아르덴 돌파를 전혀 상정하지 않았다. 벨기에령에 불시착한 소령 2명 때문에 독일군의 작전 문서가 통째로 넘어가 기존 작전의 변경이 불가피해진 상황에서, 슐리펜의 재탕인 황색 작전에 불만을 품고 있던 히틀러가 만슈타인과 구데리안의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기동이 가능해진 것이지, 원래의 독일군은 아르덴을 통과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군부의 대다수가 만슈타인의 계획을 반대했고,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하다 여겼다. 계획을 승인한 히틀러조차 아르덴 돌파가 성공한 것을 보고 기적이라고 인식할 정도였다. 최신 병기인 전차가 1호든 2호든 간에 좁은 통로에 전차들을 집어 넣는다는 계획은 그 최신 병기인 전차를 보유하고 개발한 독일군 대부분이 미친 짓이라 여긴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빠른 패전이 프랑스가 전쟁에 적응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했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제 2차 세계대전은 이전의 세계 대전 이상으로 신병기와 신전술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특히 항공기의 발전은 아주 빨라서, 2차 세계 대전사에 그 이름을 몇 번이고 자랑했던 bf 109, 슈퍼 마린 스핏파이어, a6m, f4f 와일드캣 같은 전투기의 개발은 193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진행되기 시작했다. 이들 기종의 개량과 발전은 전쟁 중에도 거듭되었으며, 전시에도 새로운 기종이 개발되어 활약한 사례가 있을 정도로 그 발전은 매우 빠른 편이었다. 이는 전술적인 차원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항공 모함의 등장은 1917년의 일이었고 이들을 이용한 육상 기지 공격 또한 1918년 퓨리어스가 해낸 바 있었다. 그리고 항공 어뢰의 발전은 그 발상을 바다로까지 확장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타란토의 이탈리아 왕립 해군, 신예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 그리고 진주만의 태평양 함대는 뇌격기의 희생양이 되었다. 최신 과학 기술의 대명사인 미국 또한 신병기와 신전술의 희생양이었다는 것이다. 프랑스가 이들과 달랐던 것은, 그 패전이 너무 빨라서 군을 재건하고 신기술과 전훈을 채택함과 동시에 적의 신병기와 전술이 준 충격을 극복하고 그들의 특징을 분석하여 아군의 강점을 살릴 수 있는 새로운 전술을 개발할 시간이 모자랐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미 해군의 어뢰 스캔들이 있다. 항공모함 기동대의 가장 강력한 창이 되어야 했던 항공 어뢰를 쓸만한 수준으로 개선한 게 개전 이후, 1년이 넘는 시간이 지난 시점의 일임을 고려해 보면, 전훈을 받아들이고 신기술과 교리를 적용하는 게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의 어뢰 스캔들은 특히 잠수함용 어뢰인 Mark.14와 항공 어뢰인 Mark.13가 가진 문제가 두드러졌다.] 이러한 사정은 비단 병기와 전술에 국한되지 않고, 전쟁을 이끌어 나가는 인간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고, 적에게 당할 수 있다. 그러나 실수를 복기하고 패배를 분석하여 그것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사람은 최소한 이전보다는 나은 대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령부라는 집단 전체를 본다면, 개개인의 능력과 특기에 맞추어 인사를 개편시킬 수 있고 병력 전체를 보면 편제를 수정하여 보다 효율적인 집단으로 개선시킬 수 있다. 다만, 이 일은 1개 야전군이 갈려나간 상황에서 6주 동안의 벼락치기로 해결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게 아니었다. 당대 프랑스 군부는 드골, 드 라트르 드 타시니, 터치온, 델레스탱과 같은 유능한 장교들에서부터 그랑드, 코라프, 레퀸과 같은 평범하거나 무능한 장교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평시에서 전시로 전환하는 다른 모든 군사 조직과 마찬가지로, 프랑스군에는 서류 작업과 평시 업무에는 탁월하지만, 전시 지휘에는 적응하지 못하는 여러 장교들이 소속되어 있었다. 그나마 실수를 배우고 독일군에게 피해를 주기 시작한 적색 상황 시기에는 이미 동맹군인 영국군이 영국 해협을 넘어 철수해버린 상태였고 이들을 엄호하던 4만 명에 달하는 프랑스 병사들이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힌 상황이었다.[* 10여만 명의 프랑스군도 탈출해서 저항했다.] 또한 프랑스군의 붕괴 사례만을 가지고 프랑스 군을 폄하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스당 전투에서 붕괴한 2개 사단이 프랑스의 230만 야전군을 대표한다고 볼 수는 없다. 게다가 스당의 프랑스군은 슈튜카의 폭격에 압박을 받았음에도 독일군 2 기갑 사단과 10 기갑 사단의 도하 작전을 거의 방어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독일군의 공세적 방어 전술에 말려들었다고 평가받는 스톤 고지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15일부터 17일까지 총 17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방어를 맡은 그로스도이칠란트 연대에 500명이 넘는 사상자를 안겨주며 일시적으로 전열에서 이탈하게 만들었다.[* 프랑스군은 총 7번, 독일군은 9번 승리했고, 16일 야간 전투는 양측 모두 고지를 점령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드골의 몽코르네 역습은 일시적으로 19 기갑 군단 후속 제대를 붕괴시켰으며, 독일군이 장블루 갭 일대의 방어선을 돌파해 전략적 승리를 거두었던 안뉘 전투에서도 프랑스군은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에게 큰 피해를 강요하고 전술적 승리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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